
솔직히 저는 닐 세다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참 멍했습니다. 2026년 2월 27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단순히 올드팝 가수가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 틴팝의 전설이자, 10년 가까운 암흑기를 딛고 70년대에 극적인 재기를 이뤄낸 사람이었죠.
제가 그를 처음 접한 건 TV였습니다. 부모님이 보시던 음악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던 오 캐롤을 듣고 "그냥 옛날 노래구나"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나중에 유튜브로 다시 듣게 됐을 때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단순한 멜로디가 이렇게 오래 머릿속에 남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브릴빌딩 시대, 십대를 위한 음악은 어떻게 탄생했나
여러분은 혹시 브릴빌딩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1939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닐 세다카가 음악 인생을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레바논계 유대인 아버지와 아슈케나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피아노 레슨을 권했을 때, 어머니는 백화점에서 반년간 일한 돈으로 중고 피아노를 들였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줄리어드 음악학교 어린이 예비 과정에 합격했죠. 어머니는 당연히 아들이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랐지만, 세상 일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13살이 된 닐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왔습니다. 이웃이 그의 연주를 듣고 자신의 아들을 소개했는데, 그게 당시 16살의 작사가 지망생 하워드 그린필드였습니다. 이 두 소년은 이후 브릴빌딩의 전설적인 작곡 콤비가 됩니다.
브릴빌딩은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건물 이름이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만들어진 음악 스타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는 이 시대가 정말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처음으로 십대만을 위한 음악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미국의 십대들은 음악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거실에서 부모가 틀어주는 프랭크 시나트라나 빙 크로스비를 들을 뿐이었죠. 엘비스 프레슬리가 등장하자 상황이 바뀌었지만, 그가 1950년대 후반 군에 입대하면서 잠시 공백이 생겼습니다.
바로 그 틈새에서 틴팝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첫사랑, 실연, 학교 생활처럼 철저히 십대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룬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수십 명의 젊은 작곡가들이 작은 방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서로 경쟁하듯 곡을 썼습니다. 마치 공장처럼 음악을 찍어냈던 그곳에 닐 세다카도 있었습니다.
지금 들으면 그냥 오래된 팝송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대 문화의 출발점이자 "십대 때 들은 음악이 평생 간다"는 개념이 시작된 곳이 바로 여기였다는 사실은 정말 중요합니다. 저는 이탈리아 카페에서 비슷한 분위기의 옛날 음악을 들으며 이 시대를 떠올린 적이 있습니다. 시대는 달라도 감정은 이어진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전성기, 그리고 사라진 10년
닐 세다카가 처음 만든 그룹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결성한 링크톤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팀을 떠났고, 이 그룹은 이름을 토큰스로 바꿔 나중에 큰 히트를 기록했죠. 반면 솔로로 나선 닐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1958년, 그의 첫 히트곡 더 다이어리가 빌보드 14위에 올랐습니다. 이 노래는 당시 최고 스타였던 코니 프란시스의 일기장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짝사랑하는 여학생의 일기장, 거기에 적힌 이름이 혹시 나일까 하는 십대의 마음을 담은 전형적인 틴팝이었죠.
하지만 이후 싱글들이 연이어 실패하면서 소속사 RCA 빅터는 그의 퇴출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의 순간, 그를 살려낸 노래가 바로 오 캐롤입니다. 빌보드 9위에 오른 이 노래의 캐롤은 실존 인물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고등학교 여자친구이자 훗날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가 되는 캐롤 킹이었습니다.
노래 가사에서 닐은 "오 캐롤, 난 바보야. 네가 날 아프게 하지만 날 떠나면 죽어버릴 거야"라고 노래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캐롤 킹이 이에 대한 답가로 오 닐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오 닐, 난 널 사랑해왔어. 네 노래에 내가 나올 줄 몰랐네"라는 가사였죠.
1960년부터 그의 히트 행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유 민 에브리씽 투 미가 17위에 올랐고, 1961년에는 캘린더 걸이 4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1962년, 브레이킹 업 이즈 하드 투 두가 드디어 빌보드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1964년,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비틀즈를 필두로 한 영국 밴드들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몰아쳤고, 미국의 틴팝 가수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습니다. 닐 세다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녹음한 잇 허츠 투 비 인 러브는 소속사의 지정 스튜디오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매가 거부됐습니다. 재녹음했지만 결과물이 좋지 않았고, 회사는 그 노래를 진 피트니라는 가수에게 다시 부르게 했습니다. 그게 빌보드 7위에 올라 히트하는 걸 지켜봐야 했습니다. 게다가 매니저가 그간의 수입을 탕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죠.
1966년 계약이 만료되자 음반사는 그를 방출했습니다. 닐 세다카는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정상에서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기분이 어땠을까요.
닐 세다카의 컴백스토리, 13년 만에 다시 1위에 오른 남자
여러분은 혹시 10년 가까운 공백기를 견디고 다시 일어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해보신 적 있나요? 1970년, 미국에서 잊혀진 닐 세다카는 영국과 호주로 눈을 돌렸습니다. 완전히 무모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그의 팬들이 있었고, 1969년 호주에서 발표한 스타크로스드 러버스가 4년 만의 히트곡이 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냉담했습니다. 1971년 RCA와 재계약해 발표한 앨범이 실패하자, 그는 과감하게 영국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훗날 10cc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는 네 명의 뮤지션과 함께 만든 앨범 솔리테어는 단순한 재기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 틴팝 시절, 닐의 창법은 과감하게 지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솔리테어를 거치며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섬세하고 부드러워졌습니다. 마치 나이를 의심할 정도였죠.
복귀한 베테랑은 70년대 소프트 록 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타이틀곡 솔리테어는 이후 앤디 윌리엄스와 카펜터스가 다시 불러 더 큰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닐 세다카의 열렬한 팬이었던 엘튼 존이었습니다. 엘튼 존은 그를 자신의 레이블 로켓 레코드로 영입하며 미국 시장 재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1974년, 마침내 그 순간이 왔습니다. 필 코디와 함께 만든 러프터 인 더 레인이 빌보드 1위에 올랐습니다. 이미 두 명의 다른 가수가 먼저 불렀지만 별 반응이 없던 노래였습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듣던 닐은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거 내가 다시 불러야겠다." 엘튼 존에게 전화를 걸고 단 5일 만에 자신의 버전을 서둘러 발매했습니다.
1962년 이후 무려 13년 만의 빌보드 1위였습니다. 거의 10년간의 암흑기를 지나 닐 세다카는 다시 정상에 섰습니다. 이 곡은 제가 가장 애정하는 닐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저는 유럽 여행 중 봄비가 내리던 날 이 노래를 들었는데, 묘하게 위로받는 느낌이었습니다.
1975년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해였을 겁니다. 배드 블러드가 그에게 세 번째 빌보드 1위를 안겨줬고, 3주간 정상을 지키며 그의 싱글 중 최고 히트작이 됐습니다. 이 노래에는 엘튼 존의 목소리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노래를 끌어내린 다음 1위곡이 바로 엘튼 존의 아일랜드 걸이었죠.
같은 해 여름에는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캡틴 앤 테닐의 러브 윌 킵 어스 투게더가 4주간 1위를 지키며 그해 최고 히트곡이 됐는데, 원곡이 1973년 닐 세다카 버전이었습니다. 캡틴 앤 테닐 버전 마지막 부분을 잘 들어보면 "세다카 이즈 백"이라는 가사가 들립니다. 컴백에 성공한 닐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였죠.
이후로도 히트는 이어졌습니다. 브레이킹 업 이즈 하드 투 두의 발라드 리메이크 버전이 8위에 올랐고, 1976년에는 디스코 열풍에 맞춰 발표한 러브 인 더 섀도우스가 16위에 올랐습니다. 1980년에는 딸 다라와 함께 부른 슈드브 네버 렛 유 고가 19위에 오르며 그의 마지막 주요 히트곡이 됐습니다.
이후에도 닐 세다카는 음악을 놓지 않았습니다. 2020년 팬데믹 시기에는 SNS를 통해 미니 콘서트를 열며 팬들 곁에 머물렀고, 손자와의 듀엣 영상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2026년 2월, 그는 평소처럼 동네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됐습니다. 당시만 해도 특별한 건강 이상은 없어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틀 뒤 갑작스러운 응급 상황으로 병원에 이송됐고, 그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86세, 87번째 생일을 불과 몇 주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저에게 닐 세다카의 노래는 그저 신나고 때로는 애절한 올드팝 중 하나였습니다. 제 십대를 관통한 음악도 아니었고, 앨범을 사서 들은 적도 없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그냥 자연스럽게 따라 부르게 되는 노래들이었죠.
그래서 인생의 결정적인 장면과 맞닿아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이유도 모르게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마치 오래돼서 흐릿해진 사진처럼 언제 찍은 건지도 가물가물한데 손에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 말입니다.
어쩌면 그게 닐 세다카의 음악이 했던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평범하지만 소중했던 순간들의 배경 음악을 남겨준 팝의 거장, 그의 평온한 안식을 바랍니다. 그가 만들어낸 멜로디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