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BBA 이후 스웨덴에서 미국 차트 1위를 찍은 팀이 또 있었나요?"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교환학생 한 명이 라디오 방송국에 건넨 CD 한 장이 모든 걸 바꿔놓았습니다. 록셋이라는 듀오는 그렇게 미국 시장에 진입했고,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네 곡의 히트곡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 학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처음 이들의 노래를 제대로 들었습니다. 창문에 김이 서려 있던 밤,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It Must Have Been Love'는 가사를 완벽히 몰랐는데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마리 프레드릭손의 목소리는 울부짖지 않는데도 아팠고, 그 감정이 제 짝사랑의 끝과 묘하게 겹쳐졌습니다.
마리 프레드릭손 목소리가 가진 힘
록셋의 음악을 논할 때 마리 프레드릭손의 목소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보컬은 강인함과 처연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습니다. 힘껏 내지르는 고음 속에서도 어딘가 금이 간 듯한 슬픔이 배어 있었고, 이것이 페르 게슬레의 명료한 멜로디 감각과 만나 묘한 대비를 이뤘습니다.
록셋이 탄생한 배경은 흥미롭습니다. 80년대 초반 스웨덴에서 페르 게슬레는 Gyllen Tider라는 밴드의 리더로, 마리 프레드릭손은 MaMas Barn의 보컬로 각각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두 팀은 같은 연습실을 사용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페르는 마리의 잠재력을 일찍부터 눈여겨봤습니다. 1984년 페르는 자신의 밴드 앨범에 마리를 백 보컬로 초대했고, 이후 EMI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듀오를 결성하게 됩니다.
록셋이라는 이름은 페르가 좋아하던 영국 밴드 Dr. Feelgood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1986년 첫 싱글 'Neverending Love'가 스웨덴 차트 3위에 오르며 출발은 산뜻했고, 데뷔 앨범 'Pearls of Passion'도 차트 2위까지 올랐습니다. 하지만 진짜 전환점은 1988년 발표한 2집 'Look Sharp!'였습니다.
저는 마리의 목소리를 처음 제대로 들었을 때 이상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당시 제가 즐겨 듣던 힙합이나 록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결이었는데, 마리의 보컬은 저를 솔직하게 만들었습니다. 괜히 허세 부리던 저를 내려놓게 했고, 말 못했던 감정들을 꺼낼 수 있게 해줬습니다. 그 후로 저는 일부러 혼자 있을 때 록셋을 들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일 때는 다른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밤 산책할 때는 록셋의 발라드를 들으며 그날의 감정을 정리했습니다.
마리의 보컬이 특별했던 건 기교가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80년대 후반 팝 음악이 화려한 프로덕션과 신시사이저 사운드로 치장되던 시기, 그녀의 목소리는 그 모든 장치 위에서도 가장 먼저 귀에 꽂혔습니다. 'Listen to Your Heart' 같은 발라드에서 그녀는 절제된 힘으로 감정을 전달했고, 'The Look' 같은 업템포 곡에서는 경쾌함 속에 서늘함을 숨겨뒀습니다.
미국 차트 정상을 향한 기적 같은 록셋의 여정
록셋이 미국 시장에 진출한 과정은 대중음악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스웨덴에서 이미 성공한 뮤지션들이 영어 앨범을 만든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세계 시장, 특히 미국 시장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EMI 아메리카는 록셋의 앨범이 미국 시장에 맞지 않는다며 발매를 거절했습니다.
이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스웨덴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딘 쿠시먼이라는 청년이 크리스마스 방학에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록셋의 'Look Sharp!' 앨범 한 장을 미네아폴리스의 라디오 방송국 KDWB에 건넸습니다. 방송국은 수록곡 'The Look'을 전파에 태웠고, 청취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노래는 매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지만 정작 음반점에는 앨범이 없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카피본이 다른 방송국들로 번져 나갔고, EMI 미국 지부는 태도를 바꿔 앨범 발매를 결정했습니다. 1989년 봄, 'The Look'은 빌보드 핫100 1위에 올랐습니다. ABBA의 'Dancing Queen' 이후 스웨덴 팝이 다시 한 번 미국 정상에 서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록셋의 성공이 단순히 운이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음악 자체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The Look'의 성공 이후 후속 싱글 'Dressed for Success'는 빌보드 14위, 발라드 'Listen to Your Heart'는 1위, 'Dangerous'는 2위에 올랐습니다.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네 곡의 히트곡을 만들어낸 건 음악 자체의 힘이었습니다.
록셋의 사운드는 록적인 기타 프레이즈와 신시사이저 중심의 댄스 비트를 절묘하게 섞은 80년대 후반의 동시대적 음악이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스웨덴의 민속 멜로디나 유럽 감성만 앞세웠다면 일회성 성공에 그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페르 게슬레와 마리 프레드릭손은 국적이 스웨덴일 뿐 팝 음악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990년 영화 '프리티 우먼'이 대히트를 기록하며 록셋의 또 다른 명곡이 탄생했습니다. 'It Must Have Been Love'는 영화 후반부 이별 장면에서 대사 없이 흘러나오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곡은 원래 1987년 크리스마스 캐럴로 만들어졌던 곡이었습니다. 투어 중이던 록셋은 신곡을 만들 여유가 없었고, 페르는 원곡 가사의 'Christmas'를 'winter'로 바꾸고 크리스마스 효과음을 제거했습니다. 특정 시즌의 캐럴이 보편적인 이별의 상징이 되는 순간이었고, 이 곡은 그들의 세 번째 빌보드 1위 곡이 되었습니다.
정규 3집 Joyride와 그 이후
1991년 3월, 록셋은 세 번째 정규 앨범 'Joyride'를 발매했습니다. 전작을 넘어야 한다는 음반사의 압박 속에서 페르 게슬레는 이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베스트 앨범처럼 들리게 만들겠다는 목표로 곡을 썼고, 녹음에만 거의 1년이 걸렸습니다.
타이틀곡 'Joyride'는 그해 5월 11일 빌보드 핫100 정상에 올라 그들의 네 번째 1위 곡이 되었습니다. 이 곡이 탄생한 과정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페르는 폴 매카트니가 한 인터뷰에서 "존 레논과 함께 곡을 쓰는 건 긴 Joyride였다"라고 말한 대목에서 제목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전작을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 속에서 '목적 없는 질주'라는 단어는 완벽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곡의 시작 부분 "안녕, 바보야. 사랑해."라는 가사는 페르의 여자 친구가 집을 나서며 피아노 위에 남긴 메모를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장난스럽고 가볍지만 분명히 사랑을 전제로 한 이 곡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곡의 트레이드마크인 휘파람 소리는 페르가 몬티 파이튼의 영화 'Life of Brian'을 보다가 영감을 얻어 직접 12번이 넘는 재녹음 끝에 얻어낸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장거리 운전할 때면 'Joyride'를 일부러 틀어봅니다.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는 날, 이 노래의 휘파람 소리와 함께 악셀을 밟으면 그때의 버스 창문, 겨울 공기, 말 못한 감정들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록셋은 제 청춘의 배경음악이라기보다 제 감정의 첫 고백 같은 존재입니다.
앨범 'Joyride'는 그들의 정규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 되었고, 타이틀곡 외에도 'Fading Like a Flower'가 빌보드 2위, 'Spending My Time'과 'Church of Your Heart'가 탑 40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순간 이후 록셋의 인기는 서서히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1992년 발표한 'Tourism'은 전 세계적으로 600만 장 이상 팔렸지만 미국에서의 부진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이 앨범은 'Joyride' 월드 투어 도중 호텔 방과 텅 빈 클럽에서 녹음한 신곡과 몇 곡의 라이브를 묶어낸, 말 그대로 투어 브이로그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시기 미국이 원하던 건 이런 결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얼터너티브 록의 광풍이 몰아치던 때였고, 록셋은 미국 차트에서 서서히 뒤로 밀려났습니다.
1994년 다음 앨범 'Crash! Boom! Bang!'의 미국 발매 방식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EMI 아메리카는 정규 앨범을 제대로 내는 대신 수록곡 중 10곡만 골라 맥도날드 매장에서만 판매했습니다. 이 독점 유통 방식은 빌보드가 차트에서 제외하면서 록셋은 새 앨범을 냈는데도 '없는 것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미국 시장에서 록셋의 음악은 인기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 때문에 접혔습니다.
2002년 9월, 마리 프레드릭손은 남편과 조깅을 마친 뒤 쓰러졌고, 뇌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후유증은 컸습니다. 그녀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듣고 읽고 쓰는 일에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2009년 페르의 투어 도중 마리는 무대에 다시 올라 'It Must Have Been Love'를 불렀습니다. 이후 록셋은 세 장의 앨범을 더 발표했지만, 이 시기의 록셋은 더 이상 과거를 재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만큼, 가능한 방식으로 노래할 뿐이었습니다.
2019년 12월, 마리 프레드릭손은 17년간 이어진 병의 시간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떠난 뒤 공개된 미공개 트랙 앨범 'Bag of Trix'의 수록곡 'Let Your Heart Dance with Me' 뮤직비디오에는 젊은 시절의 마리가 등장합니다. 2016년에 녹음된 곡이라 목소리는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록셋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록셋을 떠올리면 저는 언제나 "차 안의 음악"이라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들의 노래는 라디오를 통해 공간을 장악했고, 팝 멜로디가 얼마나 강력한 감정 장치가 될 수 있는지를 증명했습니다. 마리의 목소리는 강인함과 처연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고, 페르의 명료한 멜로디 감각과 만나 묘한 대비를 이뤘습니다.
저는 록셋을 들을 때마다 '팝의 낙관성'을 생각합니다. 세상이 복잡해지기 전, 사랑은 분명했고 이별은 극적이었으며, 후렴은 언제나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하지만 그 밝음 속에도 북유럽 특유의 서늘함이 흘렀습니다. 록셋은 미국 시장을 정복한 스웨덴 듀오였지만, 동시에 유럽 감수성을 잃지 않은 팀이었습니다. 대중음악의 본령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라면, 록셋은 그 정의에 가장 충실한 밴드였습니다. 세련된 상업성과 진심 어린 감정이 공존했던, 팝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