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저니라는 밴드를 제대로 알게 된 게 대학교 때였습니다. 아버지 차에서 흘러나오던 'Don't Stop Believin''이 귀에 익숙했지만, 그게 저니 노래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유튜브에서 우연히 아넬 피네다라는 이름을 봤습니다.
필리핀 출신 보컬이 미국 록밴드의 메인 보컬이 됐다는 것부터 의아했습니다. 더 놀라운 건 그가 유튜브 영상 하나로 오디션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2007년,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파고들수록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믿음과 우연, 그리고 간절함이 만들어낸 기적에 가까운 드라마였습니다.
유튜브 발굴
저니의 기타리스트 닐 숀은 2007년 어느 날 아침, 유튜브를 켰습니다. 목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스티브 페리를 대체할 보컬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니는 거의 10년 가까이 적합한 보컬 없이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스티브 페리가 밴드를 떠난 뒤 몇 명의 보컬이 거쳐 갔지만 모두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닐 숌은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유튜브에서 저니 커버 영상을 검색했다고 합니다. 그가 찾던 건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스티브 페리의 음색과 비슷하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보컬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조건이었습니다.
그날도 닐은 거의 11시간 동안 영상을 뒤졌다고 합니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클릭한 영상이 있었습니다. 조회수도 거의 없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영상이었습니다. 그 영상의 주인공이 바로 아넬 피네다였습니다.
영상 속 아넬은 필리핀 마닐라의 한 바에서 저니의 'Faithfully'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닐은 첫 소절을 듣자마자 소름이 돋았다고 했습니다. 목소리가 스티브 페리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지만 단순한 모창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 뭔가 거칠고 절박한 에너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 영상을 나중에 찾아봤는데, 화질도 별로고 음질도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넬의 목소리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기교보다는 진심이 느껴지는 창법이었습니다. 닐이 왜 그 영상에 꽂혔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닐은 즉시 다른 멤버들에게 영상을 공유했습니다. 처음엔 모두 반신반의했습니다. 필리핀에 사는 사람이고 영어를 제대로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닐은 확신했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저니를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영상을 올린 사람은 노엘이라는 아넬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아넬이 언젠가 뜰 거라고 믿었습니다. 집에 인터넷도 없어서 매일 밤 PC방에 가서 영상을 업로드했다고 합니다. 느린 속도를 감내하며 하나씩 꾸준히 올렸습니다. 그의 믿음이 아넬의 인생을 바꾼 셈입니다.
필리핀 출신 아넬 피네다
아넬 피네다는 1967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가난했습니다. 부모님은 재단사 일을 하셨지만 수입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심장병에 걸렸습니다.
아넬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집안의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 가구, 냉장고, TV까지 전부 내다 팔았습니다. 집세로 모은 돈마저 병원비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집세를 내지 못해 가족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넬은 어린 나이에 거리로 나가야 했습니다. 폐지를 주우며 노숙 생활을 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면 음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 모창 가수로 살아가게 됐습니다.
아넬에게 노래는 생존 수단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특히 저니의 스티브 페리 모창을 할 때 반응이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진짜 스티브 페리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넬은 그 말을 들으며 저니 노래를 더 많이 부르게 됐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아이러니를 느꼈습니다. 아넬이 생계를 위해 부르던 노래가 결국 그의 인생을 바꿨다는 점입니다. 만약 그가 다른 가수의 노래만 불렀다면 저니와 연결될 일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넬의 삶은 계속 밑바닥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뒤에도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노점상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한때는 마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노래하던 바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완전히 추락할 뻔했지만 기적적으로 재활에 성공했습니다.
2007년, 아넬은 여전히 필리핀의 작은 바에서 커버곡을 부르며 살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실력을 인정했지만 그게 한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넬 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으로 갈 기회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노엘이 이상한 메일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저니의 기타리스트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넬을 오디션에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넬은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사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닐 숀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생생한 목소리로 "우리 진짜 저니 맞다"고 말했습니다.
아넬은 아내를 설득했습니다. 진지하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노엘은 이게 진짜일 거라는 예감이 확실하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저니 멤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넬이 필리핀에 산다는 사실, 영어를 제대로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국행 비자를 발급해 줬습니다.
신데렐라 스토리
아넬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 오디션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첫날 아넬은 영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긴장했고 피곤했습니다. 멤버들은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닐 숀은 며칠만 더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며칠 뒤 아넬은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닐과 다른 멤버들은 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했습니다. 스티브 페리와 비슷하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보컬이었습니다. 거리에서 노래하며 살아온 삶의 에너지가 목소리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넬 본인은 합격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생각엔 오디션을 잘 보지 못했다고 느꼈습니다. 키도 작고 잘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국에는 분명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니는 아넬이 묵던 호텔로 찾아가 합격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넬의 인생이 순식간에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필리핀의 노숙자가 미국을 대표하는 밴드의 보컬이 된 겁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저니 멤버들의 결단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메이저 밴드라면 안전한 선택을 했을 겁니다. 검증된 미국 보컬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저니는 아넬을 믿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뿐 아니라 그가 가진 이야기를 믿었습니다.
아넬이 저니의 보컬로 발표되자 반응은 극과 극이었습니다. 필리핀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자국 출신 가수가 미국 대표 밴드의 보컬이 됐다는 사실에 국가적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니 팬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어했습니다.
당시 팬 포럼에는 온갖 모욕적인 말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인종 차별적인 발언도 많았습니다. 스티브 페리가 남긴 족적이 워낙 컸기 때문에 팬들의 기대치도 엄청났습니다. 아넬은 그걸 견뎌내야 했습니다.
아넬은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어.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향수병을 견뎌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실력으로 증명하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 3월, 아넬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3만 명의 관중이 모였습니다. 아넬은 필리핀 국기를 흔들며 'Don't Stop Believin''을 불렀습니다. 관중들은 옆 사람을 붙잡고 함께 노래했습니다.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도 아넬은 꾸준히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결정적인 기회는 오프라 윈프리 쇼였습니다. 오프라 쇼는 단순히 새 보컬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아넬의 인생 전체를 다뤘습니다.
전 미국인이 보는 앞에서 아넬은 자신의 삶을 보여줬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 노숙 생활, 마약 중독과 재활, 그리고 저니와의 만남. 그리고 그 삶을 담은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Don't Stop Believin'', 'Faithfully' 같은 곡들은 마치 아넬 자신의 이야기 같았습니다.
저는 그 영상을 나중에 봤는데 정말 울컥했습니다. 노래 가사가 그의 삶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믿음을 잃지 않고 노래한다는 메시지, 팬들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가사. 아넬은 커버 가수가 아니었습니다. 그 노래들을 자기 이야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오프라 쇼 이후 아넬은 미국인들에게 완전히 인정받았습니다. 더 이상 '스티브 페리의 대체재'가 아니었습니다. 저니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보컬이었습니다.
아넬은 지금도 활동 중입니다. 휴식기에는 항상 필리핀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냅니다. 활동기가 되면 다시 미국으로 갑니다. 성공 이후에도 자신을 지켜준 사람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니는 아넬의 영입으로 아시아 시장을 확실하게 잡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2년 전에는 한국에서도 내한 공연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컬이 스티브 페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게 아쉬웠습니다. 아넬의 이야기를 알고 저니 노래를 들으면 분명 다른 감동이 있었을 겁니다.
아넬 피네다의 이야기는 결국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믿어준 친구 노엘, 영상 하나로 그를 믿어준 저니 멤버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아넬 자신. 이 모든 믿음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꿨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 확실히 느꼈습니다. 록 음악은 여전히 살아 있고, 새로운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넬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