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이찬혁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좋다는 걸 몰랐습니다. 친구가 추천해줬던 그 순간, "이거 좋은 거 맞아?"라고 되물을 만큼 낯설었습니다. 멜로디도, 구조도, 가사도 제가 익숙하게 들어온 음악과는 결이 달랐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 잊히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데 자꾸 생각나는 상태. 이번 두 번째 솔로 앨범 EROS를 들으면서 그 오래된 감각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2025년 7월에 발매된 EROS는 전작 ERROR에서 '죽음'을 파고들었던 이찬혁이 이번에는 '사랑'으로 시선을 옮긴 앨범입니다. 단, 남녀 간의 로맨틱한 감정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향한 보편적 사랑이고, 그마저도 냉소와 비관을 통과한 사랑입니다. 그게 이 앨범을 한 번 듣고 끝내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찬혁의 첫인상
혹시 어떤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이게 뭐지' 싶었는데, 나중에 그 곡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경험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이찬혁 음악에서 처음으로 그걸 겪었습니다.
대학교 때 친구가 "파노라마"를 추천해줬을 때, 제 반응은 반가움이 아니었습니다. 구조가 낯설고, 가사가 직관적이지 않고, 멜로디도 딱 한 번에 귀에 박히는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두 번 정도 듣고 그냥 덮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곡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좋다는 확신도 없는데 머릿속에 남아있는 음악이라니.
그 감각이 무엇인지를 제가 언어로 정리하게 된 건 일본 도쿄 여행 때였습니다. 현대 미술 전시를 보러 갔는데, 전시장 안에서 작품들이 하나도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설명 문구를 읽어도 온전히 이해가 됐다고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전시장 밖을 나오고 나서, 그날 하루 내내 작품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지하철을 타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게 이찬혁의 음악이구나.' 현장에서 완전히 소화되지 않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짙어지는 것. 대학 교양 수업에서 교수님이 "현대 예술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해석의 영역"이라고 했던 말이 그때 처음으로 실감으로 와닿았습니다.
EROS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타이틀 '비비드라라러브'를 처음 들었을 때, 멜로디는 귀에 금방 들어왔지만 가사가 선뜻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상한 포도알이 다시 신선해지나"라는 구절을 두고 저는 한참을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냉소인지, 그럼에도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지. 이 앨범은 처음 들었을 때 완결된 그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밑그림만 두고 떠나버리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이찬혁의 의도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단순히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구조화해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인터뷰나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을 보면 볼수록 그 인상이 선명해집니다. 감정을 바로 전달하기보다,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물러서는 방식. 처음엔 그게 낯설었지만, 이제는 그 방식 자체가 이찬혁다움이라는 걸 압니다.
복고사운드
EROS를 이전 앨범 ERROR와 단순히 비교하는 건 어쩌면 좀 억울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두 작품은 방향 자체가 다르거든요. 그런데 비교를 완전히 피하기도 어렵습니다. 같은 아티스트가 같은 방식으로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서 만든 콘셉트 앨범이기 때문입니다.
ERROR가 '나의 죽음'을 상상하며 만들어진 앨범이라면, EROS는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첫 곡 'SINNY SINNY'에서 그 설정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상실에서 출발해, 앨범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갑니다.
사운드가 달라진 것도 이 방향과 연결됩니다. ERROR가 전자음 기반의 날카로운 질감이었다면, EROS는 신시사이저와 브라스 섹션, 겹겹이 쌓인 코러스가 어우러지는 복고적인 질감을 선택했습니다. 배경이 되는 시대도 1980년대입니다. 실제로 존재한 시대이지만, 앨범 안에서는 하나의 판타지로 작동합니다. 현실이 아닌 세계관 속에 이야기를 두는 것이 이찬혁의 메시지에 오히려 더 무게를 실어줍니다.
저는 이 선택이 굉장히 영리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시점에서 사랑이나 희망을 이야기하면, 어딘가 너무 직접적이거나 설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픽션으로서의 1980년대라는 공간을 설정해두면, 이야기가 보편성을 얻습니다. 특정 시대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결국 지금 우리 이야기가 되는 구조입니다.
물론 앨범 전체가 균일하게 완성된 느낌은 아닙니다. 전반부는 복고풍의 선율 위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얹혀있는 반면, 'Eve'를 기점으로 후반부가 톤다운되면서 앞부분이 만들어놓은 기대감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 헐거움이 없다면 더 완성도 있는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도 솔직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헐거운 부분을 채우는 게 바로 가사입니다. 'Eve'는 유일하게 순수한 사랑을 노래하는 곡이고, 'Andrew'는 스스로를 괴물처럼 묘사하며 자기 안의 어두운 면을 직시합니다. '꼬리'는 꼬리를 잃은 새에 사람을 비유하면서, 사랑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을 이야기합니다. 멜로디나 구성보다 가사가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곡들입니다.
직장에 다니면서 저는 이런 음악이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들린다는 걸 실감하고 있습니다. 피곤하고 바쁠 때 EROS를 틀면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음악은 여유가 없을 때 오히려 무겁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말에 혼자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 이 앨범을 다시 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 단순히 감정을 소비하는 음악이 아니라,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음악이라는 차이가 여기서 납니다.
희망
이찬혁이 이 앨범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했을 때, 과연 그게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냉소와 비관을 앨범 전반에 깔아두고, 결국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저는 마지막 곡 '빛나는 세상'에 도달했을 때 조금 놀랐습니다. 보코더로 뭉갠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빛나는 세상은 오지 않았지만, 그걸 바라는 우리는 빛이 날 거라고. 좌절이 반복되어 내일이 두렵냐고 물으며, 미안하게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이게 희망이라는 게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습니다. 통상 희망은 밝고 따뜻한 언어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이찬혁의 희망은 낙관이 아닙니다. 세상이 바뀔 거라는 믿음도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아도 그걸 바라는 마음 자체에서 빛을 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차이가 저한테는 꽤 길게 남았습니다.
앨범 안에서 이 희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직선이 아닙니다. '멸종위기 사랑'에서는 사랑을 멸종 위기종에 비유하는 발칙한 상상이 등장하고, 'TV show'나 '돌아버렸어'에서는 자조적인 정서가 유쾌한 멜로디에 실립니다. 뮤지션 프린스의 향기가 스치는 구간이기도 합니다. 비관과 냉소를 정면으로 통과하면서 결국 희망에 닿는 구조인 셈입니다.
이 흐름이 저는 이찬혁이 솔로 활동을 통해 성장해온 방향과 맞닿아 있다고 봅니다. 초기 악뮤 시절의 아기자기한 감성에서 시작해, 쇼미더머니에서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라는 한마디로 장르 전체에 균열을 내고, 솔로 1집에서 죽음을 직시하더니, 이번에는 그 너머의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단계를 건너뛰지 않고, 자기가 파고든 것들을 하나씩 통과하면서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대중성과 실험성 사이의 균형이 항상 완벽하게 맞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너무 앞서가서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불편함이 이찬혁의 가치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쉽게 소비되는 음악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해석하게 만드는 음악. 그게 제가 이 앨범으로 계속 돌아오게 되는 이유입니다.
결국 EROS는 이찬혁이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담은 작업입니다. 정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남기는 방식, 냉소를 통과한 끝에 희망에 도달하는 구조, 판타지로서의 1980년대를 빌려 지금 우리를 이야기하는 태도. 이 앨범은 한 번 듣고 평가 내리기보다, 여러 번 들으면서 조금씩 달리 읽히는 앨범입니다.
만약 아직 듣지 않으셨다면,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마지막 곡 '빛나는 세상'까지 순서대로 한 번 들어보시고, 며칠 뒤에 다시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처음과 두 번째가 다르게 들린다면, 그게 이 앨범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