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우림이 4년 만에 정규앨범을 냈습니다. 제목은 '라이프!'(LIFE!), 11월 9일 발매입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잠깐 멈칫했습니다. 4년이라는 시간이 짧지 않은데, 그 사이 이 밴드가 어디쯤 가 있을지 솔직히 가늠이 안 됐거든요. 그리고 김윤아가 인터뷰에서 꺼낸 한 마디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더 이상 분노를 참지 않는 새로운 자아를 찾았다"는 말이요. 자우림에게서 '참지 않는다'는 표현은 낯설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궁금해졌습니다.
자우림의 곡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분노
저는 자우림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이 밴드가 뭔가 특이하다고 느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처음 들었는데, 당시에는 그게 왜 좋은지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묘하게 불안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있었고, 그 감각이 그 시기의 제 상태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자우림은 처음부터 '음악'이 아니라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그 '상태'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됐습니다. 자우림의 음악에서 분노는 늘 존재했지만, 직접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노래 속의 감정은 언제나 한 겹 뒤에 있었고, 관조하거나 비틀거나 비유로 감싸져 있었습니다. 그게 이 밴드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왔던 거라,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선언이 낯설게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그 '관조하는 분노'라는 정서가 얼마나 오래 유지되는 것인지 잘 압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자우림을 다시 들었을 때, 예전에는 그냥 감성적인 음악이라고 느꼈던 곡들이 전혀 다르게 들렸습니다. 이를 꽉 물고 버티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하하하쏭'을 밤에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걸었던 날이 기억납니다. 낮에 들으면 장난스럽고 경쾌한 곡인데, 그날 밤에는 웃고 있는 사람이 어딘가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게 자우림 특유의 이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감정과 그 안에 실제로 있는 감정이 다릅니다.
이번 앨범 '라이프!'에서 김윤아는 그 이중성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타이틀곡 '라이프!'는 번아웃 상태에서 작업하던 중 탄생한 곡이라고 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지만 실은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표현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건 예전 자우림의 방식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훨씬 더 정면으로 꺼냈다는 느낌입니다. 관조하는 게 아니라, 몸부림 자체를 보여주는 방식으로요.
음감회 현장에서 들었다는 후기들을 보면, 삶의 혼란을 노래한 가사와 경쾌한 록 사운드가 대비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게 저는 굉장히 자우림답다고 생각합니다. 밝은 멜로디 아래에 무거운 감정을 깔아두는 것. 그런데 이번에는 그 무거운 감정을 예전처럼 숨기지 않았다고 하니, 어떻게 들릴지가 더 궁금해집니다.
스튜디오 애비로드
앨범 작업 중에 영국 런던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진행했다는 이야기가 꽤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1931년에 문을 연 곳으로, 비틀스와 퀸, 오아시스 같은 밴드들이 작업한 스튜디오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뭔가 느껴지는 공간이죠.
저는 유럽 여행 중에 파리를 혼자 걸으면서 자우림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계획한 게 아니라, 그냥 그날 기분에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는데 자우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때 느낀 건 묘하게 잘 맞는다는 감각이었습니다. 파리라는 도시가 화려하면서도 낡고,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동시에 갖고 있는데, 자우림의 음악도 딱 그런 구조를 갖고 있거든요.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고, 밝음과 어둠 사이를 계속 오가는 느낌.
그래서인지 자우림이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는 이야기가 단순한 스펙이 아니라 뭔가 잘 어울리는 조합처럼 들렸습니다. 역사가 쌓인 공간에서 꺼내는 감정이라는 게 어딘가 다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거기서 터진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수록곡 '뱀파이어'를 녹음하다가 고급 마이크가 두 대나 망가진 겁니다. 20대나 갖춰진 마이크 중에서요. 김윤아가 노래를 부르다 마이크 두 대가 잇따라 나가서, 결국 총 세 대를 써야 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일화가 웃기면서도 묘하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사 깊은 스튜디오의 장비가 버티지 못했다는 것이,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이번 앨범이 얼마나 강하게 밀어붙이는 작업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뱀파이어'라는 제목도 흥미롭습니다. 자우림은 예전부터 이런 식의 제목을 즐겨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직접적이지 않고, 어딘가 상징이나 캐릭터를 경유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요. 뱀파이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경계에 있다는 점에서, 자우림이 줄곧 탐구해온 그 경계의 정서와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직관이 맞는지는 실제로 들어봐야 알겠지만, 제목만으로도 이미 그 방향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애비로드에서의 녹음이 이 앨범에 어떤 물성을 더했을지도 궁금합니다. 공간이 소리에 영향을 준다는 건 녹음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이야기인데, 역사가 오래된 스튜디오는 특유의 울림과 공기가 있다고 합니다. 자우림의 음악이 그 공간을 어떻게 채웠을지, 그리고 그 공간이 자우림의 소리를 어떻게 받았을지가 실제로 트는 순간 느껴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정규 4집 라이프
자우림이 데뷔 3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1997년 첫 앨범 '퍼플 하트'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정규앨범만 열두 번째입니다. 그 연수를 들었을 때 저는 잠깐 멍했습니다. 30년 가까이 같은 밴드로 활동하고, 꾸준히 앨범을 내고, 여전히 현역으로 라이브를 하는 밴드가 국내에 얼마나 될까 싶었거든요.
30주년 소회를 묻는 질문에 김윤아는 "선배님들 많이 뵙다 보니 30년으로 명함을 내밀기엔 아직 부족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겸손한 말이기도 하지만, 저는 그 말에서 이 밴드가 아직도 현재형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습니다. 기념으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이 시점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요.
그 느낌은 앨범 제목에서도 이어집니다. '라이프!', 인생이여, 라고 외치는 것 같은 앨범이라고 스스로 소개했습니다. 느낌표가 붙은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탄이거나 외침이거나, 어쨌든 조용히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을 크게 소리 내어 말하는 제목입니다.
그 시절 느낀 건 자우림의 음악이 듣는 사람의 나이와 함께 자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감성적인 음악으로 들렸다가, 어느 순간 현실을 버티는 방식이 되고, 또 어느 시점엔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하는 거울이 됩니다. 같은 노래를 들어도 고등학생 때와 직장인이 된 뒤에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밴드가 흔하지는 않습니다. 저한테는 그게 자우림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계속해서 새롭게 읽히는 음악이라는 것.
이번 '라이프!'에는 트리플 타이틀곡 구성으로 '라이프!', '마이 걸', '스타스', 그리고 관악기 팡파르로 시작하는 '아테나'를 포함해 총 10곡이 담겼습니다. '아테나'는 희망찬 찬가 같은 분위기라는 후기가 있었는데, 분노와 찬가가 같은 앨범 안에 들어 있다는 게 자우림답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정리되지 않는 앨범이라는 뜻이고, 그게 인생이라는 제목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인생은 어느 한쪽으로 정리되지 않으니까요.
베이시스트 김진만이 "라이브로 들으면 더 좋을 노래들"이라고 했다는 말도 흘려듣기 어렵습니다. 자우림의 라이브는 저도 경험해본 적이 있는데, 음반에서는 층위가 쌓여 있는 감정들이 무대에서는 훨씬 직접적으로 날아옵니다. 이번 앨범이 분노를 더 직접적으로 꺼냈다고 한다면, 라이브에서는 어떻게 증폭될지가 진짜로 기대됩니다.
자우림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이 밴드가 하는 이야기는 늘 지금 이 시점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게 30년 가까이 유지된 힘인 것 같습니다.
이번 앨범이 기대되는 건 그래서입니다. 4년이라는 시간이 쌓인 끝에,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만든 음악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지금까지의 자우림과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여전히 자우림인지를 직접 들어보고 싶습니다.
앨범이 나오면 한 번에 다 듣지 말고, 밤에 이어폰으로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트는 것을 권합니다. 자우림의 음악은 그럴 때 가장 잘 들립니다. 낮에 들으면 들리지 않는 감정들이 밤에는 조용히 올라옵니다. 적어도 저는 매번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