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근길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다 보면, 가끔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어느 날 회사 일로 머리가 복잡했던 순간, 우연히 틀어놓은 'Sailing'을 듣고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크로스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80년대 초반 그래미 주요 부문을 휩쓸며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던 뮤지션입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뉴웨이브와는 달랐습니다. 부드럽고 잔잔한 멜로디, 서두르지 않는 리듬, 그리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천천히 풀어주는 보컬. 그는 '요트락'이라는 장르의 상징이 되었고, 지금도 그의 노래는 복잡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넵니다.
19살 기타리스트가 딥 퍼플 대타로 무대에 서기까지
크리스토퍼 크로스의 시작은 극적이었습니다. 1970년 8월, 텍사스 샌 안토니오의 라이브 클럽 '더 잼 팩토리'에서 딥 퍼플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가 독감 예방 접종 부작용으로 무대에 서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클럽 주인은 급히 대타를 찾아야 했고, 그때 불려 나간 사람이 당시 19살이었던 크리스토퍼 찰스 게포트, 즉 크리스토퍼 크로스였습니다. 동네에서 가장 기타를 잘 친다고 소문난 젊은 연주자였죠.
저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19살에 딥 퍼플 대타라니, 떨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소 클럽에서 공연도 하고 잔심부름도 도맡아 하던 사람이었고, 그날도 딥 퍼플 멤버들을 공항까지 데려다주고 리치 블랙모어에게 기타 피크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훗날 딥 퍼플의 존 로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했지만, 당시 오프닝 무대에 섰던 에릭 존슨이 사실임을 확인했죠. 에릭 존슨, 스티비 레이 본, 빌리 기븐스 같은 쟁쟁한 기타리스트들과 교류하며 성장한 그는 이후 친구들과 '플래시'라는 밴드를 시작했고, 오스틴으로 이주한 뒤 베이시스트 앤디 새, 키보디스트 로 모러, 드러머 토미 테일러와 함께 '크리스토퍼 크로스'라는 4인조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70년대 후반, 이들은 클럽에서 번 돈으로 자작곡을 녹음해 여러 음반사에 데모 테이프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텍사스 애들 음악이 너무 말랑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죠. 당시는 뉴웨이브가 대세였고, 모든 음반사가 80년대를 준비하며 강렬한 사운드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소프트 락을 하는 무명 밴드를 주목하는 곳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워너 뮤직의 A&R 담당자 마이클 오마션이 그들의 곡을 듣고 강력하게 추천하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마이클은 단순한 A&R이 아니었습니다. 스틸리 댄의 여러 앨범에서 건반 세션을 맡았고, 빌리 조엘의 'Piano Man'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했던 인물이었죠. 크리스토퍼 크로스는 처음엔 그를 몰라 시큰둥했지만, 자신의 롤 모델인 스틸리 댄과 함께 작업한 사실을 알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데뷔 앨범 녹음 과정은 화려했습니다. 마이클 오마션의 넓은 인맥 덕분에 래리 칼튼, 에릭 존슨 같은 기타리스트와 이글스의 돈 헨리, 두비 브라더스의 마이클 맥도널드 같은 빅 네임들이 백 보컬로 참여했습니다. 첫 싱글 'Ride Like the Wind'는 1980년 4월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올랐지만, 블론디의 'Call Me'에 밀려 4주 연속 2위에 머물렀습니다. 아쉽긴 했지만, 후반부에 등장하는 크리스토퍼 크로스의 기타 솔로와 마이클 맥도널드의 백 보컬은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마이클 맥도널드 측에서 두 번 연속 그의 목소리를 활용하는 것에 불편함을 표시하며, 두 번째 싱글로 예정되었던 곡 대신 'Sailing'이 발표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의 한 수였습니다.
'Sailing'과 그래미 5관왕의 기록
'Sailing'은 1980년 8월 30일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이 곡을 들으면 정말 잔잔한 물 위를 미끄러져 가는 요트에 오른 기분이 듭니다. 저는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순간 막힌 도로가 아니라 수평선이 펼쳐진 바다 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이 부는 상상,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 현실은 회색 도로였지만, 음악은 푸른 바다를 그렸습니다.
크리스토퍼 크로스는 10대 시절, 이웃의 선배처럼 의지하던 알 글래스코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작은 보트가 있어서 두 소년은 텍사스의 캐년 레이크에서 자주 배를 탔다고 합니다. 감정적으로 불안했던 그 시절, 작은 배를 타고 있던 시간은 어린 그에게 큰 안정감과 평화를 안겨 주었습니다. 'Sailing'은 바로 그 기억을 담은 노래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두 사람의 연락이 끊어졌지만, 1995년 한 라디오 쇼를 통해 28년 만에 다시 만났고, 크리스토퍼는 감사의 선물로 'Sailing'의 플래티넘 디스크를 선배에게 전했습니다.
'Sailing'은 단 한 주 동안만 1위에 머물렀지만, 그 후폭풍은 대단했습니다. 이듬해 열린 1981년 제23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크리스토퍼 크로스는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최우수 편곡', '올해의 앨범', '최우수 신인상'까지 5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한 아티스트가 네 개의 주요 부문을 휩쓴 것은 최초의 기록이었고, 이 기록은 2020년 빌리 아일리시가 등장하기 전까지 39년간 깨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크리스토퍼 크로스가 솔로 가수냐 밴드냐 하는 정체성 문제입니다. 사실 그들은 4인조 밴드로 계약을 맺었지만, 모든 곡을 크리스토퍼가 만들었고 음반사는 처음부터 그를 솔로 가수로 홍보했습니다. 게다가 그래미 같은 중요한 행사에서 혼자 무대에 올랐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남자 솔로 뮤지션으로 각인되었습니다. 나머지 멤버들도 앨범 녹음과 라이브에 참여했지만, 이후 '크리스토퍼 크로스'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그 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데뷔 앨범에서는 'Never Be the Same'이 15위, 'Say You'll Be Mine'이 20위에 오르며 총 네 곡의 탑 40 히트를 배출했습니다.
1981년, 크리스토퍼 크로스는 진짜 솔로 가수로서 또 다른 잊을 수 없는 히트곡을 발표했습니다. 바로 영화 '아서'의 주제곡인 'Best That You Can Do'였습니다. 이 영화는 더들리 무어와 라이자 미넬리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로, 금수저로 태어난 망나니 아서가 노동자 계층 여성 린다를 만나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입니다. 이 노래는 80년대 라디오에서 정말 많이 흘러나왔고, 중반부의 색소폰 연주와 "문 앤 뉴욕 시티"라는 가사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달과 뉴욕 사이에 갇혔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바로 사랑에 빠지는 겁니다." 영화 속에서 아서의 할머니는 그에게 정략 결혼 상대인 수잔과 혼인하지 않으면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달은 사랑에 빠지는 특별한 순간을 의미하고, 뉴욕은 집안의 유산과 세속적인 가치를 뜻합니다. 이 멋진 가사는 버트 바카락과 함께 곡을 만든 작사가 피터 앨런의 아이디어였습니다. 피터는 주연 배우 라이자 미넬리의 전 남편이기도 했는데, 몇 년 전 자신이 탄 비행기가 뉴욕 JFK 공항에 악천후로 착륙하지 못하고 한참 공중에서 선회하는 동안 이 구절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영화는 초반 흥행이 좋지 않았지만 평론가들의 호평과 관객들의 입소문이 퍼지면서 1981년 흥행 4위를 기록했습니다. 오프닝과 엔딩에 두 번 흐르는 이 아름다운 노래가 히트곡이 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Best That You Can Do'는 1981년 10월 17일, 9주 연속 1위를 지키던 다이애나 로스와 라이오넬 리치의 'Endless Love'를 제치고 1위에 올라 총 3주간 정상을 지켰고,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에서 최우수 오리지널 주제가상을 받았습니다.
크리스토퍼 크로스의 두 번째 앨범과 요트락의 재조명
'Best That You Can Do'가 돌풍을 일으키는 동안, 크리스토퍼 크로스의 두 번째 앨범 발매는 잠정 연기되었습니다. 1983년에 나온 '어나더 페이지'는 데뷔 앨범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지만, 두 곡의 히트곡을 배출했습니다. 앨범 커버를 보면 플라밍고, 즉 홍학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밴드 멤버들이 데뷔 전 직접 그려본 뒤 연습실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했지만, 크리스토퍼 크로스 특유의 잔잔한 사운드와 무리 지어 걷는 홍학의 이미지는 묘하게 잘 어울렸습니다.
'어나더 페이지'는 밴드 멤버들인 로 모러, 앤디 새, 토미 테일러가 참여한 마지막 작품이었고, 데뷔 앨범보다 더 호화로운 세션 팀이 참여했습니다. 토토의 제프 포카로, 스티브 루카서, 마이크 포카로, 그리고 다시 한번 마이클 맥도날드가 백 보컬로 참여했습니다. 첫 싱글 'All It Takes'는 12위, 'Think of Laura'는 9위로 마지막 탑 40 히트곡이 되었습니다.
'Think of Laura'는 1982년 4월 17일 갱단의 총격전에 휘말려 사망한 여대생 로라 카터를 추모하는 곡이었습니다. 당시 크리스토퍼 크로스와 사귀던 페이지 맥린이 싱글 커버에 등장했는데, 사망한 로라가 페이지의 룸메이트였기 때문에 이 곡은 지극히 개인적인 추모곡이었습니다. 하지만 싱글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습니다. 미국 ABC 방송국의 장수 드라마 '제너럴 하스피털'에서였습니다. 저도 어릴 때 낮에 이 드라마가 나오길래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본 기억이 있습니다.
80년대 초반 이 드라마를 이끌던 커플이 루크와 로라였고, 두 사람이 결혼하는 에피소드의 시청률은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 기록입니다. 방송사는 로라라는 제목만 보고 두 배역과 관련된 장면에서 이 곡을 틀기 시작했습니다. ABC는 크리스토퍼 크로스 측의 허락도 받지 않고 사용했고 로열티도 지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후 드라마 덕분에 노래가 사랑받은 것은 감사하지만, 추모곡이 러브 발라드로 인식된 점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80년대 초반 크리스토퍼 크로스는 정말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80년대 중반부터 그의 음악은 서서히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음악 시장의 변화였습니다. 1985년에 나온 세 번째 앨범 'Every Turn of the World'를 들어보면 신시사이저와 전자 드럼을 전면에 내세우며 당시 트렌드를 반영하려 했지만, 그의 음악 본질은 여전히 소프트 락이었습니다. 게다가 MTV 중심으로 돌아가던 음악 시장에서 대중들은 더 많은 시청각적 자극을 원했고, 그가 버틸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결국 'Arthur's Theme'를 끝으로 크리스토퍼 크로스는 더 이상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2005년 '요트 락'이라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통해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인기를 누린 소프트 락이 재조명되면서, 크리스토퍼 크로스는 다시 한번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요트 락'이라는 용어가 일부 평론가들에 의해 경멸적인 뉘앙스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은 어느 시대 못지않게 동요하던 시기였고, 뉴웨이브의 물결 속에서도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운 음악을 사랑했던 것은 그 시대가 평화로워서가 아니라 그만큼 위로와 안식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퇴근길에 일부러 그의 노래를 틀어놓습니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입니다. 크리스토퍼 크로스는 제게 거창한 감동 대신 잔잔한 회복을 줍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세상이 조금 느려집니다. 급하게 답을 찾지 않아도 괜찮다는 느낌. 나는 그 느린 리듬 덕분에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그게 제 방식의 항해입니다.
크리스토퍼 크로스의 목소리는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부드럽게 감쌉니다. 듣는 이를 긴장시키지 않고, 서서히 풀어줍니다. 마치 해 질 무렵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의 음악은 과시하지 않는 부드러움의 힘을 보여줍니다. 작은 보트 위에서 안식을 얻었던 'Sailing', 사랑을 택했던 '아서의 테마', 그리고 상처받은 누군가를 위로하는 곡들은 더없이 갑갑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변치 않는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가끔 복잡한 하루 끝에 그의 노래를 틀어놓고, 잠시 바다 위에 떠 있는 기분을 상상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제가 달과 뉴욕 사이 어딘가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처럼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