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출근길에 무심코 틀었던 플레이리스트에서 펄프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순간 작년 여름 인천 펜타포트 락페스티벌의 뜨거운 공기와 함께 떠올랐던 건, 자비스 코커가 무대에서 특유의 몸짓으로 관객을 휘어잡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펄프가 새로운 곡을 공개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펄프가 발표한 신곡 'Begging for Change'는 단순한 컴백 싱글이 아니라, 전쟁 피해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 앨범에 참여한 곡이었습니다. 30년 전 그들이 보여줬던 진심 어린 행보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다시 한번 이 밴드의 팬으로 만들었습니다.
War Child 자선앨범과 펄프의 30년 약속
펄프의 신곡이 수록된 자선 앨범 'Help(2)'는 오는 3월 6일 발매 예정입니다. 이 앨범은 1995년에 처음 발매된 'Help' 앨범의 두 번째 버전으로, 당시 보스니아 분쟁으로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을 위해 125만 파운드라는 큰 금액을 모금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오아시스, 폴 매카트니, 라디오헤드 같은 쟁쟁한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던 그 앨범은, 브릿팝 시대의 상징이자 음악이 사회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저는 작년 인천 펜타포트에서 펄프를 처음 제대로 경험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Common People' 정도만 알았고, 솔직히 브릿팝 중에서는 블러나 오아시스 쪽에 더 끌렸던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라이브로 자비스 코커의 무대를 보니, 이 사람은 단순히 노래 잘하는 뮤지션이 아니라 자기만의 철학과 신념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예술가라는 걸 느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펄프가 1996년 머큐리 프라이즈를 수상하고 받은 상금을 전액 War Child에 기부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알게 됐을 때였습니다. 자비스 코커는 최근 보도자료에서도 "30년 전 우리는 머큐리 프라이즈 상금을 War Child에 기부했다"며, "올해는 더 많은 금액을 기부했다"고 말했습니다. 단순히 이벤성으로 참여하는 게 아니라, 30년 동안 묵묵히 같은 가치를 실천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Begging for Change'라는 제목 자체가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변화를 간청한다는 뜻과 동시에, 동전 한 푼을 구걸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펄프답게 위트 있으면서도 날카로운 제목입니다. 이 곡은 그들이 지난해 발표한 앨범 'More'를 작업하던 중 녹음되었다고 하는데, 듣고 있으면 여전히 펄프만의 냉소적이면서도 따뜻한 감성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인천 펜타포트에서 만난 펄프, 그리고 브릿팝의 온도
작년 8월 인천 펜타포트 락페스티벌은 제게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브릿팝을 파고들던 시절, 카페 구석에 앉아 'Common People' 가사를 한 줄 한 줄 번역해가며 웃고 떠들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비스 코커의 가사는 단순히 멜로디에 실린 단어들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던 청춘의 불안과 애매함을 정확히 꿰뚫는 문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밴드를 직접 눈앞에서 보게 된 겁니다. 헤드라이너로 등장한 펄프는,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습니다. 자비스 코커는 무대 위에서 과장된 몸짓으로 춤을 췄고, 관객들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환호했습니다. 저 역시 그 순간만큼은 20대 초반으로 돌아간 것처럼 열광했습니다.
펜타포트 무대에서 그들이 연주한 곡들은 대부분 제가 잘 모르는 노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곡들을 통해 펄프라는 밴드가 얼마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저는 바로 펄프의 앨범들을 찾아 들었고, 'Different Class'부터 'This Is Hardcore'까지 한참을 빠져 지냈습니다.
브릿팝이라고 하면 보통 블러와 오아시스의 대결 구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한 펄프는 그 대결 구도와는 다른 차원에 있었습니다. 화려한 후렴구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일상의 디테일을 파고들며 사람들의 진짜 삶을 노래하는 밴드였습니다. 펜타포트 무대에서 자비스 코커가 관객들을 바라보며 던진 한 마디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We're just ordinary people, aren't we?"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밴드, 그게 바로 펄프였습니다.
그 공연 이후 저는 회사 회식 후 2차로 간 펍에서 우연히 'Common People'이 나왔을 때 반가워서 따라 불렀습니다. 옆에 있던 동료는 저를 신기하게 쳐다봤지만, 저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펄프의 음악은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라, 애매하고 불완전한 우리의 삶을 노래하니까요. 그게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평범함을 노래하는 밴드, 펄프만의 철학
펄프는 브릿팝 시대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블러가 앨범 하나로 엄청난 화제를 모으고, 오아시스가 거대한 후렴으로 스타디움을 채울 때, 펄프는 계급 문제와 일상의 고민을 날카롭게 비틀어 가사로 만들었습니다. 'Different Class' 앨범에 수록된 'Common People'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춤추기 좋은 리듬 위에 얹힌 사회적 풍자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시에 즐겁고도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만듭니다.
저는 펄프의 가사를 읽으면서, 제가 겪던 서툰 청춘의 불안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자비스 코커는 멋있는 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솔직하게, 때로는 냉소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그의 무대 매너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장된 제스처와 특유의 몸짓은 록 스타의 전형을 비틀어버립니다. 멋있기보다는 진실하고, 화려하기보다는 현실적입니다.
펄프의 음악은 반짝임보다 현실에 가깝습니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 거창한 꿈이나 성공담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저 자신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게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고, 때로는 용기가 됩니다. 작년 펜타포트에서 느꼈던 그 감정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곡 'Begging for Change'는 펄프가 여전히 그 철학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화려한 복귀를 선언하는 대신, 자선 앨범에 조용히 참여하며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30년 전 그들이 머큐리 프라이즈 상금을 기부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들은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신곡 발표를 계기로 펄프의 음악을 다시 듣고 있습니다. 'More' 앨범도 찾아 들었는데, 그들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날카롭고 유머러스합니다. 펄프의 음악이 오래 남는 이유는 아마도 이것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진실을 발견하게 만듭니다.
펄프를 듣고 있으면, 제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자비스 코커가 말했듯, 우리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리고 그 평범함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3월 6일 발매되는 'Help(2)' 앨범이 기대됩니다. 펄프의 신곡뿐 아니라, 어떤 아티스트들이 참여했을지도 궁금합니다. 30년 전 브릿팝 세대가 다시 모여 만들어낸 이 앨범이, 전쟁 피해 어린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처럼 펄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앨범을 통해 다시 한번 그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참고: https://pitchfork.com/news/pulp-shares-new-song-begging-for-ch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