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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ke의 시대, 플랫폼이 된 래퍼 (감성, 토론토 사운드, 충돌)

by oasis 2026. 2. 25.

무대 위 드레이크의 모습

 

비 오는 날 한강을 걷다가 이어폰으로 Drake의 노래를 듣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성공한 사람의 자신감과 동시에 묘하게 외로운 감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성공했는데도 쓸쓸해 보일까. Drake는 캐나다 토론토 출신으로 배우에서 래퍼로 전향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아티스트입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유대계 캐나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에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고, 관절염을 앓던 어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가난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성장하길 바라며 토론토의 부유한 동네로 이사했고, Drake는 배우로 활동하며 시즌당 수만 달러를 벌어 집안 살림에 보탰습니다. 하지만 그는 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음악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힙합 역사를 바꿔놓았습니다.

감성을 노래하는 래퍼의 탄생

Drake가 음악계에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는 랩을 하는지 노래를 하는지 경계가 모호했고, 다른 래퍼들처럼 거친 스트리트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그의 음악을 들었을 때 이게 힙합인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듣다 보니 그 애매함이 오히려 매력이었습니다.

그의 세 번째 믹스테이프인 So Far Gone은 Drake 음악의 본질을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다른 래퍼들이 성공을 향한 열정이나 쾌락을 노래할 때, 그는 유명세가 주는 공허함을 이야기했습니다. 작은 성공에도 취해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삶을 방해하는 덫처럼 표현하는 이중적 감성은 Drake만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동아리에서 그의 스타일을 흉내 내보려 했지만 그 묘한 쓸쓸함은 쉽게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음악적 특징 중 하나는 랩과 노래의 완벽한 결합이었습니다. 칸예 웨스트가 808s and Heartbreak으로 길을 닦았다면, Drake는 그 길 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확장했습니다. 칸예의 음악이 비극을 표현하기 위한 힙합 실험이었다면, Drake의 음악은 R&B에 가까운 힙합으로 훨씬 부드럽게 다가왔습니다. 오토튠 대신 본연의 목소리를 담아낸 그의 선택은 멜로디와 감정이 수단이 아닌 목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프로듀서 40과의 만남도 중요했습니다. Drake가 추구하는 R&B에 가까운 힙합을 다른 프로듀서들이 구현하지 못할 때 40이 직접 나서 해결하며 핵심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토론토 사운드라 불리는 우울하고 몽환적인 힙합 R&B 크로스오버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Best I Ever Had라는 곡은 랩과 노래를 완벽히 오가며 빌보드 2위와 그래미 후보에 올랐고, 신선함과 중독성을 겸비한 초대형 신인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Drake의 정규 2집 Take Care는 모든 곡이 차트를 겨냥한 듯 캐치하게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특히 Marvins Room이라는 곡은 마빈 게이의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는데, 이미 다른 사람과 잘 살고 있는 여자에게 전화해 시비를 거는 추잡한 내용이지만 많은 이들이 속으로 공감할 수 있는 솔직한 감정을 담았습니다. 터프한 것을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한 면을 숨기지 않는 Drake의 진솔함이 빛났습니다.

Drake의 토론토 사운드와 글로벌 확장

Drake를 이야기할 때 토론토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단순히 토론토 출신이 아니라 로컬 아티스트들을 서포트하며 도시의 소리를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입니다. 위켄드와의 만남은 토론토 사운드가 유행이 아닌 하나의 현상임을 입증했습니다. Drake는 위켄드의 곡들을 자신의 앨범에 여러 곡 수록했고, 두 토론토 아이콘의 만남은 사람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저는 직관 영상에서 Drake를 본 적이 있는데 그는 무대에서 여유로웠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외로움을 담고 있었습니다. 블로그에 그때 이렇게 썼습니다. Drake는 가장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가장 외로운 목소리를 낸다고 말입니다. 그는 OVO 사운드라는 자체 레이블을 설립하여 파티넥스트도어, 로이 우즈 등 토론토 아티스트들과 계약하며 토론토 씬을 양적 질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4집 Views에서 Drake는 토론토로의 회귀를 선언했습니다. 토론토는 도시 인구의 절반이 타국에서 태어났을 만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One Dance라는 곡은 UK 펑키 장르를 샘플링했는데, UK 펑키는 아프리카, 카리브해, 영국의 리듬이 섞인 디아스포라 그 자체인 장르였습니다. 아프리카계 아버지와 유대계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Drake 역시 디아스포라 키드였기에 이 곡은 매우 토론토스럽고 Drake스러웠습니다.

그는 이미 나이지리아 스타 위즈키 대곡 리믹스, 리아나와의 댄스 크로스오버곡 Work 등을 통해 디아스포라 사운드에 꾸준히 도전해왔습니다. One Dance는 그 실험 끝에 나온 확신의 한 방이었고, 본인 곡으로는 최초로 빌보드 1위에 10주간 오르며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터진 라틴붐, 케이팝붐, 아프로붐을 볼 때 그의 행보는 선구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Drake가 다른 장르를 훔친다는 비판과 Drake 덕분에 알려져서 좋다는 찬사가 공존했습니다. 작은 시장에서 활동하던 뮤지션들은 Drake 덕분에 글로벌 진출에 성공했다며 기뻐했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이 그가 여러 장르의 간판이 되어가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서는 양면적인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가 여러 문화를 소개하는 건 좋지만, 과연 그것이 존중인지 약탈인지 선을 긋기 어려웠습니다.

Drake는 Views를 기점으로 토론토의 다문화성을 내세워 글로벌 사운드를 소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2017년 More Life는 앨범도 믹스테이프도 아닌 플레이리스트라 명명되었는데,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세가 된 시대에 여러 장르와 아티스트의 곡을 편집한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협업자를 넘어 민족학자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고, 북미, 카리브해, 유럽, 아프리카의 흑인 음악이 인터넷을 통해 한데 모이고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포착했습니다.

켄드릭 라마와의 충돌과 힙합의 자정

Drake는 2018년에도 시대의 키워드를 흡수하며 차트 정상을 유지했습니다. Gods Plan으로 연초부터 핫백 1위를 차지했고, Nice for What으로 또다시 1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해 5월 래퍼 푸샤 T가 Drake를 공격하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푸샤 T는 Drake의 가사 대필 문제와 그를 힙합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The Story of Adidon이라는 디스곡에서 Drake에게 숨겨둔 아들이 있다는 충격적인 폭로를 하며 디스전을 완벽한 승리로 끝냈습니다.

이 사건은 Drake가 단순한 래퍼가 아니라 전 세계 음악과 미국의 메인스트림을 연결하는 거대한 시스템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랩 다국적 기업이라 불렸고, 힙합이 Drake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힙합이라는 문화보다 더 큰 래퍼는 없었습니다. 누구라도 힙합보다 커질 것 같으면 언제든 목을 베이는 것이 이 바닥의 생리였습니다.

2024년 켄드릭 라마가 Drake를 공격하며 힙합 역사에 길이 남을 드캔 대전이 벌어졌습니다. 켄드릭은 미국 힙합의 대표적인 슬럼가 출신으로, 그의 힙합은 소외된 흑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메가폰이었습니다. 반면 Drake는 캐나다 출신의 흑백 혼혈로 부유한 유년기를 보낸 배우 출신이었고, 그의 힙합은 자신과 전 세계의 모든 장르를 연결하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에 가까웠습니다.

켄드릭은 Not Like Us라는 곡에서 Drake에게 남의 문화를 훔쳐가는 약탈자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Drake가 미성년자를 밝히는 개변태라는 폭로까지 하며 싸움을 완벽한 승리로 끝냈습니다. 저는 최근 이 디스전을 지켜보며 Drake의 노래가 더욱 외롭고 강렬하게 들렸습니다. 그가 완패한 이후 켄드릭의 소속사이자 자신의 소속사이기도 한 유니버설 뮤직 그룹을 향해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는 디스전에서 졌다고 소송을 거는 것이 힙합 문화를 위험하게 만들 뿐 아니라 힙합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Drake는 힙합 빌런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힙합이 지금의 규모로 커질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공을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는 래퍼로서 근본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 근본 없음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랩과 보컬의 역할을 따질 때 그는 둘을 섞었고, 어떤 인종, 국가, 장르건 비즈니스만 되면 거침없이 협업하여 힙합의 아웃사이더에서 인사이더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새 아티스트와 장르를 대중에게 소개했고, 동료 래퍼들은 그의 피처링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저는 Drake가 혁명가라기보다 전략가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취향을 정확히 읽고 그 위에서 감정을 유통시키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늘 차트에 있지만 동시에 늘 논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드캔 대전은 힙합의 자정 작용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고, 이후 메인스트림 힙합의 규모는 줄었으며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힙합이 숫자나 트렌드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다시 각자의 개성과 로컬을 중시하는 포스트 Drake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문화적 순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Drake의 음악을 들으며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가장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가장 외로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의 약함을 숨기지 않는 솔직함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습니다. 상업적으로 그는 거의 독주 체제였지만, 그만큼 안전하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새로운 실험보다는 트렌드를 흡수하고 세련되게 포장하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rake는 힙합이 확장될 수 있는 권리를 증명한 인물이었고, 그의 영향력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고: https://youtu.be/aeK-DAPQ0Pw?si=4Z9I1rml2JzYc82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