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7년 몬트리올 공연에서 로저 워터스가 팬에게 침을 뱉었다는 사건은 충격적이지만, 저는 오히려 그 절망감이 이해됩니다. 2년 뒤 나온 The Wall은 그 사건을 출발점 삼아 누적 판매 3천만 장을 기록하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3위 안에 들었습니다. 콘셉트 앨범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이건 한 인간의 심리 해부 보고서에 가깝습니다.
전쟁이 남긴 벽돌, 아버지 없는 유년기
로저 워터스는 생후 5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1944년 2차 대전에서 전사한 아버지 에릭 플레처 워터스. 앨범은 산타가 잊고 찾아가지 않은 소년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 설정 자체가 상실의 은유입니다.
영화 속에서 어린 핑크가 아버지 유품인 탄환을 가지고 철길에서 노는 장면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열차 속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가면을 쓰고 있죠.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전쟁이라는 시스템이 개인을 어떻게 벽돌 하나로 만들어버리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1에서 반복되는 "벽돌"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핑크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쌓아 올리는 구체적인 층위입니다.
어머니는 과보호로 아들을 지키려 하지만, 정작 그 보호막이 핑크를 세상과 단절시킵니다. Mother에서 "내가 너의 모든 악몽을 현실로 만들어 줄게"라는 가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모순적입니다. 아들이 계속 곁에 머물길 바라는 어머니의 욕망이 아들의 악몽을 필요로 한다는 역설이죠.
교육이라는 이름의 폭력, 그리고 스타덤의 공허함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는 1980년 빌보드 1위에 4주간 올랐던 곡입니다. 저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우리에게 이따위 교육은 필요 없어"라는 가사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는 걸 느낍니다. 획일화된 교육 시스템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죠.
영화 속에서 똑같은 가면을 쓴 아이들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소시지 기계로 갈려 들어가는 애니메이션은 끔찍하지만 정확합니다. 교사는 핑크의 시를 빼앗아 조롱하는데, 그 시가 핑크 플로이드의 Money 가사 일부였다는 건 아이러니입니다. 교사 본인도 가정에서 쓰레기 취급받으며 스트레스를 학생들에게 풀고 있었으니까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구조.
성장해 스타가 된 핑크는 In The Flesh에서 독재자처럼 등장합니다. 로저 워터스가 진짜 경계했던 건 무대 위 페르소나와 실제 자신을 구분 못 하는 광적인 팬덤이었습니다. 대형 스타디움 공연은 음반사의 탐욕이 만든 결과였고, 관객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제가 요즘 회사 프로젝트 꼬일 때마다 이 앨범이 생각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선 괜찮은 척하지만, 속에선 계속 벽을 쌓고 있거든요.
Pink Floyd가 만든 벽의 완성, 그리고 붕괴 가능성
결혼 생활은 시간 역순으로 전개됩니다. 행복했던 시작부터 아내의 외도, 그리고 핑크의 절망까지. 제가 인상 깊었던 건 핑크가 아내를 바라보는 초점 없는 눈빛이었습니다. 이미 관계는 끝나 있었던 거죠.
Empty Spaces에서 두 송이 꽃이 관능적으로 얽히다가 여성 쪽이 상대를 물어뜯어 괴물로 변하는 애니메이션은 충격적입니다. 어머니의 과보호와 아내의 배신, 이 두 사건이 여성 전체에 대한 핑크의 왜곡된 시각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 괴물이 나치 독일의 런던 공습 당시 등장한 괴물과 닮았다는 점은, 개인적 트라우마가 역사적 트라우마와 겹쳐진다는 걸 보여줍니다.
What Shall We Do Now에서 핑크는 텅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소비를 제안합니다. 더 좋은 차, 폭탄, 집을 부수는 것까지. 저는 이 부분에서 SNS를 떠올렸습니다. 수천 명의 팔로워 중 진짜 친구가 몇 명이나 될까요. 소비와 전시로 쌓아 올린 자존감 역시 또 다른 벽입니다.
Comfortably Numb에서 데이비드 길모어의 기타 솔로는 감정이 탈육화되어 허공을 떠도는 느낌을 줍니다. 핑크는 담배불이 피부에 닿아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내면에 갇혀 있습니다. 저도 야근 끝에 집에 돌아와 이 곡을 들으면, 하루 동안 쌓인 말 못 한 감정들이 벽돌처럼 느껴집니다.
The Wall은 위로를 주기보다 직면하게 만드는 앨범입니다. 사회가 우리를 상처 입히지만, 그 상처를 어떻게 쌓아 올릴지는 결국 개인의 몫이라는 점에서 냉혹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암시되는 재판과 벽의 붕괴는 가능성을 남겨둡니다. 제 벽도 언젠가는 허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벽을 쌓고 있습니까.